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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서울올림픽의 픽토그램 연구에 몰두했던 34세 때의 어느 겨울 저녁.

프론티어 정신으로 80년대 디자인계 문맹 퇴치 운동 주도,
한국 디자인계에서 흔하지 않은 지장 가운데 한 사람.


김종민/ 월간디자인 기자


.....1983년 11월 황부용은 명지전문대를 비롯해서 8년 동안 몸담았던 대학 강단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서울올림픽대회조직위원회 디자인실의 책임자 자리를 맡기 위해서였다.

.....해방 이후, 아니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그리고 이제까지 주최했던 어느 행사 보다 규모가 큰 제 10회 서울아시아경기대회와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 라는 대사를 준비하면서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는 일찌기 디자인이 차지하는 역할에 대해 깊이 인식하고 당시 조직위 안의 디자인 관계업무에 많은 관심을 갖고 지원을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조직위원회에서 어떤 기준으로 어떤 심의를 거쳐 그를 물망에 올렸는가 하는 문제는 논외로 하더라도 당사자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황부용 자신도 한번쯤 투신하고 싶은 매력있는 일이라는 데에는 동감을 하면서도 한동안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스물 여섯부터 시작한 가르친다는 일이 이제는 이력이 날 정도로 익숙해져 있었고 어느 정도 권태를 느끼기도 했지만 전임 교수의 자리를 내놓는다는 것은 곧 강단을 떠나 전혀 다른 길을 걷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6개월 가량 생각한 끝에 조직위의 권유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당시의 심정을 그는 이렇게 술회했다.

....."당시 오랫동안 몸담았던 강단을 떠난 것에 대해 후회는 않습니다. 생각해 보면 강단에 있는 동안 보람도 없지 않았지만 당시엔 우리나라의 디자인이 그다지 활성화되지 못한 상황이었어요 기업에서 행해지는 디자인 작업도 창의성 있는 일들이라고는 할 수 없었어요. 디자인이란 회화작업과 달라 사업적 목표에 의해 일정 규모 이상의 지금이 지원되지 않으면 착수하기가 어려운 것 아닙니까. 교직에서 생기는 고정적인 수입을 바탕으로 창의적인 작업을 할 욕심도 있었지만 그것 역시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밖에도 그는 자신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결코 바람직하지 못했던 당시 디자인계의 부정적인 상황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어느 분야나 그러하겠지만 학교라는 곳은 적당히 안주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안성마춤인 곳이다. 디자인처럼 직접적으로 기업의 이윤추구에 대한 기여가 활동의 전제조건이 되어야 하는 분야일수록 상대적으로더욱 그렇다. 디자이너가 기업에 있다가 학교로 옮기는 경우는 많아도 강단에서 기업 현장으로 전직하는 경우는 드문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와 같은 해명은 지나치게 자기비판적이다. 보다 긍정적인 이유를 들자면 디자이너로서 좀더 치열한 목표를 가지고 창의적인 일을 할 수 있는 프로페셔널 디자이너가 되고자 하는 것에 가치를 두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1987년 9월까지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디자인실장으로서 그가 맡은 일은 디자인 실무보다는 조직위의 관계자에게 디자인 행정에 관해 조언하고 디자인 제반 문제의 결정ㆍ계획ㆍ예산집행ㆍ인선 등의 자문에 응하는 역할이었다. 그가 기대한 대로 뚜렷한 목표와 클라이언트가 있다는 것은 이처럼 중요한 프로젝트를 담당했다는 자부심과 함께 그에게 대단한 추진력을 주었고 올림픽 행사의 디자인 프로젝트는 힘들었겠지만 즐거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그랜드 스케일 디자인인 올림픽의 디자인 업무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며 관리할 수 있었던 것은 이후 일의 천체적인 흐름을 파악하고 사람과 조직을 운용하는 능력을 축적할 수 있는 기회였다고 회상했다.

.....그 스스로도 말하지만 그의 인생관 또는 사업가로서의 경영철학은 장차의 큰 이익을 위해서는 당장의 작은 손실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근 완료된 어느 프로젝트의 경우 작년 한 해 동안 그가 운영하는 디자인 브리지가 수주한 일 가운데 유일하게 적자를 보았다고 한다. 그 일의 규모와 비중을 의식해 욕심이 작용했고, 이는 곧 디자인 작업에서 수입과 직결되는 시간의 초과투입이 불가피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당장의 적자는 피할 수 없었지만 결과물에 만족한 클라이언트 측에서는 이후 발생하는 많은 디자인 업무를 디자인브리지에 의뢰할 것을 약속했다는 것이다. 결국은 신용이라는 커다란 자본을 축적한 격이 된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디지이너로서의 그의 기질 과 사업가의 넓은 안목을 대변하는 것으로 보아도 좋을 듯하다.

.....황부용은 이제 막 40 줄에 들어선 나이로 한창 원기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 배우고 변화하고 발전해 나갈 그의 연대기를 작품으로 구분 짓는다는 것은 시기상조일 것이다. 그가 선택한 몇 번의 전환기 - 대학시절부터 명지전문대 재직 시절까지, 올림픽 조직위원회 디자인실장 시절 이후 현재까지 - 를 통해 그는 나름대로의 굴곡을 경험했을 터이지만 줄기차게 지향하고 있는 바는 개념적 접근 방식에 의한 디자인 작업이다.

.....그의 대학시절인 1971년을 전후해서 독일ㆍ폴란드ㆍ미국ㆍ쿠바 등지에서 선풍처럼 일어난 이 개념적 접근방식에 의한 디자인 방법론은 일본과 한국에도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전파되고 있었다. 이러한 방식은 전달하려는 메시지에 의해 떠오르는 여러 개념들을 혼합ㆍ도치ㆍ상치시키는 등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여 보는 이의 관심을 유도하고 그 결과가 강렬하게 의미를 전달하게끔 하는 것은 물론 즐거움도 주려는 시도이다.

.....대학시절에 영향 받은 이러한 경향은 1970년대 초부터 자신의 포스터 작품을 통해 꾸준히 보여지고 있는데 그의 이러한 작품은 드라마틱한 내용과 간결한 표현을 특징으로 한 포스터 아트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초창기에 보여준 그의 작품 레오파드ㆍ파라솔 쇼ㆍ창작과 비평ㆍ소노라마 등 일련의 포스터 작품이 이에 속한다. 조직위 근무당시 1986년 10회 서울아시아경기대회를 위한 공식포스터 5종을 비롯, 국내외에 소개되어 국제공모전에서 입상한 일련의 포스터들도 같은 범주의 작품들이다. 아시안 게임 포스터 시리즈 5종 모두 3인 또는 3연속동작, 3단계의 클로즈업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10회 서울아시아경기대회 휘장의 조형요소인 3태극과 동질성을 갖는 개념으로 연출한 것이다.

.....다소 장황한 것이 되었지만 위에서 열거한 황부용의 몇 가지 성향은 조직위 시절, 행정에서부터 실무에 이르기까지의 디자인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낼 수 있었던 이유로 들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모습에서 나름대로 구축해온 디자인세계, 추구하는 디자인 관을 엿보게 된다.

.....황부용은 한국 디자인계에서 흔하지 않은 지장(智將: 지혜가 많은 장수) 가운데 한 사람으로 안팎으로 인정받은 달변 못지않게 또한 달필이다. 월간 디자인이 유일한 디자인 전문지였던 70년대와 80년대에 그는 본지의 단골 필자였다. 대표적인 글로 1986년 1월호부터 1987년 5월호까지 연재된 '이미지를 만드는 사람들'은 총 13회, 200자 원고지 총 800매 분량 이었으며 역시 연재물로 1987년 8월호부터 이듬해 3월호까지의 '현대 그래픽 디자인 100년 - 아르누보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 총14 회가 있다.

.....'이미지를 만드는 사람들'은 수필의 형식을 빈 준 평론 성격의 것으로 해방 이후 한국 그래픽 디자인계를 빛낸 디자이너들과 그들의 작품에 대한 평을 담담하고 논리 정연하게 펼쳐나간 것이었다.

.....'현대 그래픽 디자인 100년 - 아르누보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는 1878년부터 1977년까지 꼭 100년 동안 세계 그래픽 디자인의 역사에서 일어난 사건의 연표이다. 세계 디자인의 역사를 각종 디자인 사조와 운동의 생성과 소멸, 세계적인 디자이너의 활동과 업적, 한국에서의 디자인 상황 등을 항목별로 정리했는데, 디자인 외적인 주요 사건들을 곁들임으로써 이해를 듭고 있다.

.....그가 이처럼 상당한 기간과 노력을 들여 수집, 정리했을 이처럼 방대한 자료를 필요로 하는 디자인의 역사적 기록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대학시절, '타임지'가 표지에 항상 인물을 등장시키는 이유를 중국을 움직이는 것 은공산주의가 아니라 모택동인 것처럼, 세계를 움직이는 것은 사상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 것에 깊이 동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디자인 선진국에서도 주목할 만한 인물이 서서히 부각되기 시작하던 시기여서 어렵지 않게 오래지 않은 과거로부터 디자인사의 인물들과 그들과 직간접으로 관련된 사건들을 정리해 놓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느꼈던 바를 연재물 서두에서 밝히곤 했는데, 그것은 개개인이 하는 디자인 행위가 커다란 역사의 흐름에서 어떤 사고의 흐름이 되고 있으며 어떤 결과를 낳느냐 하는 것을 인식하자는 것이다. 이는 개인의 존재와 가치 지향의 좌표를 설정하는 것인데, 이러한 생각이 정립되지 않으면 테크니션이나 직장인에 머무르고 마는 것이 아니냐고 염려했다.

.....그는 이야기 중에 '디자인 문맹' 이란 용어를 자주 사용했다. 더 이상 학습하지 않으므로 해서 발전하지 않는, 변화하고 있는 국제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외국어 해독력이 없는, 정확한 기준에 따라 디자인 결과물을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하는, 전체 속의 자신을 파악하지 못하는 우물 안 개구리 식의 디자이너와 디자인계를 지칭하는 말이다.

....."1960년대 중반, 선진 서구의 그래픽 디자인의 개념이 도입된 지 25년이 지난 이제는 주먹구구식 디자인은 끝났습니다. 누군가 지적했듯이 80년대 초 이전 한국에는 솔직히 디자인에 있어 아마추어와 프로페셔널의 구분이 없이 다만 어떤 학교 어떤 직장에 몸을 담고 있느냐 하는 것으로 판단했죠. 그런 현상은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점차 사라졌는데 이제 1990년대에는 무엇보다 어떤 프로젝트를 얼마나 잘해냈느냐 하는 것이 가치 기준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는 그 자신이 해내지 못한 디자인 비평 에 대한 미련도 버리지 않고 있는 듯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비평문화의 뿌리가 깊습니다. 아직 디자인계에서는 그 뿌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데 자유로운 비평과 토론이 없으면 디자인의 모렇도 형성될 수 없습니다. 매체를 통한 대화의 물꼬를 트는 것은 창조적인 정신의 근원을 만드는 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세대에서 평론가가 나오기를 기대하지만 디자인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객관성을 상실하고 편견에 빠지기 쉬운 예를 이미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일찌기 1977년부터 2년 동안 월간 디자인의 아트 디렉션을 담당하면서 잡지에 에디토리얼 디자인 개념을 정착시켰고, 1978년에는 서체개발의 불모지에서 헤드라인용 서체인 '황미디엄'을 개발, 자비로 출간하기도 하고 디자인 서적 전문출판사인 시각문화사를 설립해 선진 디자인 이론의 보급을 꾀하는 등 디자인계의 질적 향상을 위해 동분서주해 온 황부용. 그는 현재 1988년 9월 설립한 디자인브리지의 대표 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자리에 있다. 디자인 브리지의 업무영역은 CIP, 캐릭터를 이용한 팬시개발, 에디토리얼 디자인 분야인데 그에게는 각 분야에 모두 풍부한 경험과 그에 따른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일이다.

.....요즘은 6월 완간을 목표로 캐릭터를 이용한 전질 20권의 동화전집 '또래와 토리'를 제작하느라 여념이 없다. 아동도서 전문출판사인 계몽사의 의뢰로 기획과 저작, 편집과 제작의 전 과정을 맡아 8개월 째 해 오고 있는데 이 책은 일부가 완성되는 대로 영어로 제작해 이탈리아 국제아동도서 견본시장에 출품할 예정이다.

.....당장의 목표는 이 책이 견본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는 것이겠지만 기자 개인적으로는 좀 더 좋은 그래픽 작품을 디자인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큰 바위 얼굴' 이야기처럼 디자인 비평가를 기다리던 사람이 바로 기다리던 비평가가 되어 주기를 더욱 기대하는 것은 어떨까.

.....[1990년 3월]


컨셉추얼한 접근으로 자신만의 진한 조형언어를 창출,
이론ㆍ합리성ㆍ디자인 센스를 동시에 갖춘 디자이너.


노성연/ 디자인저널 기자


.....미국을 대표하는 시사 주간지 '타임지'의 표지는 거의 인물로 장식된다. 예를 들면 호메이니ㆍ조지 부시ㆍ마가렛 대처ㆍ고르바초프ㆍ등소평ㆍ다케시타 노보루 등의 유명인물에서 최근 북경시위 가담자의 얼굴까지.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어떤 이데올로기ㆍ에너지ㆍ윤리 등이 아니라 바로 사람이기 때문에 '타임지'의 표지에는 항상 사람을 싣는다."는 '타임지' 설립자의 말에 감명을 받았다는 황부용 씨는, 이를 디자인에 적용시킨다. 때문에 그는 무엇보다도 디자인을 하는 사람들, 즉 디자이너에 대한 관심이 남보다도 유난하다. 타임지 설립자의 말처럼, 세상을 움직이는 것이 바로 사람이듯이 디자인계를 움직이는 것도 바로 디자이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거의 몇몇 디자이너들에 의해 디자인 경향과 사조가 결정 지워 진만큼, 디자이너들을 연구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디자인의 역사ㆍ철학 등을 모두 포함하여 연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변에서 그를 표현하는 것처럼 이론ㆍ합리성ㆍ디자인 센스를 동시에 갖춘 보기 드문 제3세대 디자이너로서 그가 X축, Y축으로 종횡무진 함은, 더욱 진한 자신만의 조형언어를 보이기 위한 선결작업일 것이다.

.....'흑성탈출' 이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준 충격이 무척이나 컸었다는 황부용. 인류 평화의 상징이었던 자유의 여신상이 바닷가에 쓰러져 있는 이 마지막 장면은, 보는이로 하여금 서슬이 퍼런 칼날에 베인 것 같은 여운이 남게 했음을 그는 잊지 못한다고 한다. "비둘기와 폭탄 등은 평화포스터에 자주 등장하는 초보적인 소재입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관건이 되는데, 그 두 가지 소재를 이용해, 보는 이로 하여금 혹성탈출의 마지막 장면과 같은 충격을 주고싶어 오브제 화 시켰습니다." 1997년 제2회 파리국제포스터살롱에 출품해 2등상에 입상한 평화 포스터를 통해, 그는 일상적인 소재를 비일상적으로 다룸으로써 마치 화석화된 느낌을 강조하고자 했다고 전한다. 그는 그래픽 디자인과 문학성과의 밀접한 관계를 주장한다. 즉 그래픽 디자인이 처음 타이포그래피로 출발한 것은 바로 문학에 대한 조형화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1978넌 그가 개발한 한글 타이포그래피 '황미디엄'도 바로 그래픽 디자인의 원류를 더듬고자 시도했던 작업이었던 것이다.

.....그가 그래픽 디자인에 있어 문학성을 강조하게 된 데에는, 짧지만 고교시절 문예반에서의 활동에서 기인한다고도 볼 수 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중학교 시절에 이르기 까지 각종 미술분야의 상을 도맡아 받던 그가 고교에 진학하고부터 부모님의 반대로 잠시 몸담았던 문예반으로의 외도는 글 잘 쓰는 디자이너 황부용, 작품에 문학성을 추구하는 디자이너 황부용으로서의 색깔을지니게 하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한 것이리라. 대학시절 학보의 각종 삽화나 만평 등을 도맡아 했던 것도 그의 조형언어의 폭을 넓히는 데 적잖이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외에도 대학가의 인쇄물이나 연극 등의 각종 행사 포스터를 위주로 한 아르바이트를 끊이지 않고 맡아하면서, 그는 무척 독립심이 강한 성격을 표출시켜 왔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이기도 했겠지만 주어진 일을 하기보다는 일을 만들면서 해나가는 성격인지라, 당시 가깝게 지내던 김진평ㆍ윤학중 씨 등과도 어울려, 호텔에서 숙식을 하며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었다. 패기만만했던 그는 아르바이트를 통한 실무를 경험하면서도 나름대로의 작품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기존 선배들의 작품과는다른 방향의 직품을 구상, 1975년 대한민국 산업디자인전의 추천작가가 된다. 이렇게 그가 추구했던 스타일의 디자인은 이후 대한민국 산업디자인전에 많은 영향을 가져다 주게 된다.

.....세사람이 같이 가다보면 그 중 한 사람에게는 배울 점이 있다는 옛말이 있다. 만약 황부용 씨가 세 사람과 같이 길을 가게 된다면 아마도 그 세 사람 모두에게서 배울 점을 찾아 내고야 말 것이다. 그리고는 그 장점들을 흡수하여 그만의 향기가 배어 있는 작품 세계를 도출해 낼 것이다. 예를 들면 모교의 김교만 교수에게서는 사람의 감정을 정서적으로 움직이는 측면의 디자인 방법을 배웠고, 조영제 교수에게서는 논리적인 배경이 깔린 합리적인 스타일의 디자인과, 비즈니스와 디자인의 관계 등을 배웠으며, 양승춘 교수에게서는 메카니즘에 의해 형성되는 디자인의 측면을, 김수석 교수에게서는 디자인 이론의 접근방법 등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같은 연배인 김현 씨에게서는 디자인의 어프로치 방법을, 또 구동조 씨에게서는 디테일에서 찾아지는 심미성 등을 배웠다는 것이다. 만약 더 거론한다면 그의 입을 통해 그에게 영향을 준 사람은, 아마 그와 연을 맺었던 모든 사람이 될지도 모를 것이다.

....."모방을 한다는 것,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창조의 에너지를 흡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도용하고는 의미가 다르지요 때문에 디자인의 쇄국정책은 디자인의 발전을 그만큼 저해하는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차원에서 해석할 때, 적절한 모방의 믹스는 바로 창조력의 원동력입니다. 대부분의 디자이너들이 유난히도 민감하게 생각하는 부분을 그는 이같이 긍정적으로 해석한다. 그는 일본이 일찍 디자인의 국제화에 눈을 뜨고 현대 디자인의 발달을보게 된 이유를, 제2차세계대전에 참패하고도 미국의 디자인을 과감하게 수용하고 그들과 협동작업을 했기 때문으로 본다.

.....따라서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는 우리나라 디자인계도 보다 나은 발전을 위해서는, 거시적인 안목에서 국제감각의 수용이 필요하다고 그는 강조하고 있다. 한편 1977년부터 그는26세의 젊은 나이로 명지전문대학의 교수직에 몸담으면서 6년동안 "티칭 이즈 러닝."의 기회를 맞이한다. 그 곳에서 그는 전문대학에 맞는 커리큘럼을 만들어 개성화 시키기 위한 편집디자인 강좌를 개설하는데, 이는 국내 대학에서는 처음으로 실시된 강좌였다. 외국 잡지 '세븐틴' '라이프' '타임' 등을 창작 교재로 하고 일서의 번역본을 이론 교재로 한 그 강의로 인해, 당시 각 잡지사에는 그 학교 졸업생이 부재한 곳이 드물 정도였다고 한다.

.....그에게는 이외에도 남다른 프론티어 정신이 있다. 해외 디자이너와 디자인에 관한 정보를 접하는 것이 대학시절 이후 지금까지 취미처럼 되어 버린 그는, 우리나라 디자이너들에게는 정보가 많이 부족하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즉 절름발이식의 창작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히는 물음 하에, 1979년에는 출판에 손을 대어 시각문화문고를 출판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의욕적으로 손대기 시작한 그의 이 사업은, 처음에 많은 호응을 받았던 것과는 달리 시대적인 상황의 미숙과 재정난으로 인해서, 12권을 발간한 것을 마지막으로 폐간되고 만다. 교수로서의 재임이나 출판물의 간행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남들 보다 한발 앞서 생각한 바를 실천하고 또 그에 부수되는 손실까지도 한발 먼저 겪은 디자이너인 것이다.

.....디자이너가 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그는 지금 영화감독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극장의 출입이 가능한 나이가 되기도 전에, 현재 추억의 명작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영화들을 두루 섭렵하였던 그는, 영화의 내용 보다는 영상에 관심을 갖고 매료되어 한 때는 영화감독으로서의 꿈을 가지기도 했던 것이다. "저 스스로는 작화가이기보다는 연출가이기를 원합니다. 일러스트레이션이나 타이포그래피는 처음부터 마무리까지 디자이너 개인의 능력을 보여 주어야 하나, 그래픽디자이너는 A에서 Z까지 다른 사람의 능력을 많이 끌어들여 훌륭한 결과가 나올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컨셉추얼한 디자인은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제가 추구하는 디자인의 방향입니다." 자신을 서론형의 디자이너라고 말하는 그는, 본론과 결론은 될 수 있으면 다른 사람들에 의해 도출되기를 원하며, 그렇기 때문에 최근의 작품들은 그 한 사람의 작품이기보다도 합작품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

.....그의 작품은 섬세한 쪽보다는 볼드한 타입입니다. 처음 대한민국산업디자인전에 가서 그의 작품을 대했을 때 임팩트를 강하게 받았죠 술을 같이 마셔도 볼드한 성격이 나타나며 위트가 있어 분위기를 잘 살리죠 잘 알려져 있다시피, 글도 잘 쓸 뿐더러 달변이어서 각종 모임의 사회를 도맡아서 합니다. 김영기 씨는욕심 않고 야망 있는 디자이너로 그를 평한다.

.....그가 지금까지 추구하는 컨셉추얼한 디자인은 그의 대학시절 독일에서 발생한 것으로 그는 일찍부터 그 영향을 받아 왔다. 때문에 메시지를 전달함에 있어서 그는 개념을 믹스한다거나, 도치시킨다거나, 상치시킨다거나, 초현실주의적 방법을 통해 상대방의 관심을 끌고 그 결과가 즐거움을 주고 강렬한 메시지가 되게 하려는 데 포커스를 맞추는 것이다. 한때는 초기에 그는 그의 작품이 서구적이고 깔끔하게 처리가 되어 일본풍이라는 말을 많이 듣기도 했었는데, 이에 대해 그는 그 당시 체계화되지 못한 디자인의 평가기준이 낳은 오판으로 보고 있다. 자신의 디자인에 굳이 풍을 부여하자면 독일풍이라는 것이다. 대학 3학년 때부터 컨셉추얼한 디자인을 시도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조그마한 프로젝트라도 그것을 적용하고자 해왔던 노력이 이를 증명한다고 할 수 있다.

.....대학에 재직하고 일을 당시, 작품에 대한 열의가 남달리 강했던 그에게 지금의 자리에 이르게 한 전환점이 된 것은, 올림픽조직위원회 디자인실장으로서 추천이었다. 방향전환의 기로에 서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는, 스스로 무엇이 되고 싶은가에 대한 자문과 자답을 거듭하였다. 그리고 끄집어 낸 해답은 남을 가르치는 것보다 창조를 하고 그 창조물이 나에게 보람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1983년 서울올림픽대회조직위원회의 디자인실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올림픽은 우리 디자인계에 아직 노하우가 없는 상황에서 치루었기 때문에 큰 성과는 못 거두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국내외적으로 많은 사람들과 접할 수가 있었고, 디자인계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보듯이 허와 실을 파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죠." 개 인적으로는 현재의 그를 있게 한 계기로 사회적으로는 우리나라 디자인계를 진단해 봄으로써 그 발전의 계기가 된 올림픽은 우리나라 디자인의 역사에 하나의 획을 긋는 기회였다고 그는 보고 있다. 아인슈타인이 "이 우주에는 인간이 아직 밝혀 내지 못한 수없이 많은 법칙들이 존재한다."라고 말한 것처럼, 그는 디자인에도 어떠한 공식이 있다고 생각한다. 말로써 표현되지 않는 그 공식을 디자이너는 발견할 수 있으며, 그것을 찾기 위해서는 기초 디자인적인 접근이 필요한데, 합리적인 디자인 위에 컨셉추얼한 디자인을 추구하는 그의 디자인 특성도 바로 그러한 근거에서 발생된 것이다.

....."모든 디자인의 해답은 그 문제 안에 있다." 이는 최근 그의 디자인 모토이다. 디자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문제를 해부하고 증폭시켜 확대경으로 들여다 보면서, 숨어있는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토 아래 1988년 9월에 출범을 본 디자인브리지를 이끌고 나갈 포부를 그는 이렇게 밝힌다.

....."디자이너 자신의 조형성이나 재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매체가 포스터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낙후된 장르에 속합니다. 때문에 포스터 문화의 향상에 제나름대로의 노력을 기울이고 싶고, 한편 경영에 참여하여 기업을 문화적으로 변신시킬 수 있는 계기로서의 CIP를 발전시키는 디자인 시스템을 전개하고 싶습니다. 이외에도 그는 거시적인 구상이 담긴 전집류의 책자를 구상하면서 방대한 스케일의 편집디자인을 계획하고 있기도 하다. 주위에서 그들 볼드한 사람으로 또 확신 있는 추진력을 행사하는 사람으로 평함은 그가 보여 온 궤적의 근거일 것이다.

....."세계는 이미 한 개의 커뮤니케이션 시대" 라는 황부용. 따라서 세계 어디에선가 디자인적 사상이나 조류가 발생하면 이에 대하 동조자가 생겨야 한다고 말한다. 같은 커뮤니케이션 활동을 해나감으로 해서 국제화를 이루어 나가려면 선결 조건으로 사상ㆍ모럴ㆍ조형세계 등의 경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디자인의 모렬 문제는 광고없이 클라이언트가 줄을 잇게 하는 중요한 요건이 된다며, 한의사의 정성어린 처방과 약효의 진실이 구전되어, 문전성시를 이루는 한의원을 그 예로 든다. 군인이나 의사에 디자이너를 곧 잘 비유하는 그는, 군인의 다양한 전투경험과 의사의 치료경력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의사는 귀가 커야 한다. 즉 환자가 말하는 것을 될 수 있는 한 많이 들으라는 말이지만, 처방을 내릴 때는 확고한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 " 라는 그의 말은, 디자이너가 창작에 몰두할 때는 자기 나름대로의 소신과 주장이 있어야 함을 강조하는 말이다.

.....큰 귀를 갖고자 히는 디자이너, 황부용. 하나의 시와 같은, 또 한 편의 영화와 같은 감동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는 그를 지켜보는 눈이 많음을, 그는 스스로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을 탄탄한 기반 위에 우뚝 선 그의 모습에서, 한국 그래픽디자인계의 세계적 위상이 투영되는 듯하다.

.....[198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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