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1 | 기사-2 | 칼럼 | 강연 | 인터뷰 | 일러스트-1 | 일러스트-2 | 로고-1 | 로고-2
픽토그램 | 포스터-1 | 포스터-2 | 출판 | 신문-1 | 신문-2 | 타이프페이스 | 패키지 | 환경 | 약력






Hwang Medium, a typeface design manual published by Mijinsa in 1978.
The letters shown above are 6 pages of among 128 pages.





...............디자인 분야 최초로 한글 활자체 개발

...............황부용은 1973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응용미술과 졸업 작품으로 한글 활자체 디자인을 발표, 한국 시각 디자인 분야에 최초로 한글 활자체 개발이라는 화두를 던진 인물이었습니다. 군 복무 후 명지실업전문대학 도안과 교수로 재직하던 1978년 (주)미진사 간행으로 한국 활자체 디자인 연구서 "황미디엄"을 발간했는데 1300자의 독창적인 한글 디자인과 한글 활자 디자인 개발에 대한 사상과 방법 등이 상세하게 수록된 이 책은 당시 한국 시각디자인계에 충격적인 반응을 일으켰고 김진평ㆍ안상수ㆍ석금호 등의 한글 디자인 전문가들이 본격적으로 탄생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또 황부용은 1995년 중앙일보사 편집국으로부터 2001년에는 전자신문사 편집국으로부터 2005년에는 조선일보사 편집국으로부터 신문디자인 전문위원으로 위촉되어 한글세대를 위한 한글 전용 가로짜기 신문 편집 고유양식과 운용체계 개발에 새 지평을 열기도 했습니다.

...............1. 활자 디자인 시대 개척

...............황부용은 22세였던 1973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응용미술과 상업미술 전공 대학생의 신분으로 한국 시각디자인계에 최초로 활자체 개발이라는 화두를 던진 인물이었습니다. 황부용의 졸업 작품은 당시 한국에서 사진식자 사업을 대표적으로 활발하게 하고 있던 (주)한국사진식자연구소 김영옥 사장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한글의 문자 구성이나 조형원리가 알파벳이나 중국의 한자, 일본 글자와는 다르기에 한글 디자인 개발에 적용할 수 있는 고유한 사상과 방법을 개발했고, 한글 활자 디자인에 적합한 새로운 조형요소 발견 논리 개발과 새로운 균형 논리와 구성 논리 개발을 연구했던 것입니다. 당시에 한글 활자 디자인은 일제강점기부터 일부 신문사와 출판사를 중심으로 전문적인 디자인 교육을 받지 않은 화공들에 의해서 그 명맥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2. 최초의 한글 활자체 연구서 발행

...............황부용은 군 복무 후 명지실업전문대학 교수로 재직하던 1978년 (주)미진사 라는 출판사를 통해 128쪽 규모로 한글 활자 디자인 연구서 "황미디엄"을 발간했는데 이는 본격적인 컴퓨터 시대의 도래 이전인 아날로그 시대 한국 시각디자인계의 한글 활자 개발에 관한 본격적인 첫 시도였습니다. 1300여 자의 독창적인 한글 디자인 체계와 한글 활자 디자인 개발에 대한 사상과 방법이 상세하게 수록된 이 책은 초판 500부를 발행했으며 당시 한국 시각디자인 분야에 충격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수많은 젊고 유능한 인재들이 한글 디자인 분야에 뛰어들게 했고 김진평ㆍ안상수ㆍ석금호 등 한글만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신세대 한글 활자 개발자들이 본격적으로 탄생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3. 한글 활자체 개발 교육

...............황부용은 1976년부터 1983년까지 8년간 명지실업전문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글 레터링과 편집디자인 과목을 개설해서 가르쳤는데 이는 국내 대학과정에서는 최초였습니다. 많은 졸업생들을 배출해 그 당시에 서울시내 웬만한 잡지사에는 모두 다 명지실업전문대학 출신 편집디자이너가 한 명씩 근무하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서울에서는 잡지의 편집 일은 인문계 대학 출신들이 주로 담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한글 활자 개발 교육에 있어서 고유한 조립단위 개발과 한글 활자 디자인에 적합한 새로운 조형요소 논리 개발과 새로운 균형 논리와 구성 논리 개발을 강조했던 황부용의 교육방식은 많은 학생들이 한글 활자 개발에 눈을 뜨게 해 차원 높은 한글 활자와 도안들이 서울의 신문사 및 잡지사, 출판사 등을 통해 한국 사회에 널리 보급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1983년 9월 황부용은 서울올림픽대회조직위원회 디자인실장으로 지명 위촉되어 명지실업전문대학 교수직을 떠났습니다.

...............4. 명작 한글 상표 발표

...............황부용의 대표적인 기업을 위한 한글 디자인 작품으로 1975년에 발표된 제일모직 골덴텍스 한글 상표 디자인과 1983년 발표된 흥국생명주식회사의 한글 상호 디자인, 1993년 발표된 수산업협동조합중앙회의 한글 상호 디자인 및 전용서체 디자인, 1995년 발표된 중앙일보 한글 제호 디자인, 1996년 발표된 제주일보 한글 제호 디자인, 1997년 발표된 경상일보 한글 제호 디자인, 2003년 발표된 사단법인 국학원 한글 상호 디자인 등이 있습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1975년에 발표된 골덴텍스, 1983년 발표된 흥국생명, 1995년 발표된 중앙일보 한글 레터링은 우아한 기품을 지닌 최고의 명작으로 칭송 받았으며 수많은 한글 디자이너들에게 창작의 영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5. 한글 전용 신문 디자인 시대 개척

...............황부용은 1995년 중앙일보 신문디자인 전문위원으로 발탁되어 한글세대를 위한 한글 전용 가로짜기 신문 편집 고유양식과 운용체계 개발에 새 지평을 열었습니다. 이후 2001년에는 전자신문, 2005년에는 조선일보에서도 한글세대를 위한 한글 전용 가로짜기 신문디자인 전문위원으로 위촉되어 신문디자인 편집 고유양식과 운용체계 개발에 기여했습니다. 국내 신문 편집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이었으며 중앙일보에서는 발행부수가 확장되는 일까지 발생해 발행부수 기준으로 (1)조선 (2)동아 (3)중앙 서열이 (1)조선 (2)중앙 (3)동아 서열로 바뀌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1973년 1월 출간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졸업앨범에 수록된 황부용의 졸업작품

...............1970년대의 한글 서체 환경은 어떤 상황이었나?

...............그 당시는 모든 게 시작이었다. 서울대와 홍익대가 디자인계의 중심이었지만, 구할 수 있는 정보가 별로 없었다. 다만, 일본 책들이 많이 들어왔다. 격월간 <아이디어>와 계간 <그래픽디자인> 잡지가 대표적이었다. 거의 일본을 통해서 영향을 받았다고 보면 된다. 당시 디자인을 가르치던 양대 학교 교수들은 대개 응용미술과, 공예과 출신들인데 제자들과 함께 일본 잡지를 통해서 그래픽디자인의 개념을 알아가던 시기였다. 1960년대 일본 디자인, 특히 그래픽디자인계는 서구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우리나라는 2000년대에 와서 그 수준으로 올라갔으니 일본과는 40년 이상 차이가 났던 셈이다. 당시 일본 디자인계는 굉장히 왕성했다. 카쓰미 마사루라는 일본의 저명한 불문학자가 있었는데, 고단샤(講談社) 라는 출판사의 자문위원 중 한 사람으로서 그래픽디자인 분야의 중요성을 깨닫고 <그래픽디자인>이라는 계간지를 내기 시작했다. 이 분이 영어가 능통하니까 일본 디자이너들을 해외에 소개시키고, 서양 의 새로운 경향을 일본에 소개하면서 일본 그래픽디자인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 올렸다. 그 중심이 바로 계간 <그래픽디자인> 이라는 잡지였다. 1969년 대학에 들어 가니까 서울대, 홍익대 할 것 없이 영어가 되는 교수가 없었다. 엄격히 얘기하면 다 독학파들이다. 발령이 그쪽으로 나서 디자인 교수를 한 것이지 정규 디자인 교육을 이수하고 교수를 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다만, 조영제 같은 분은 서울대 미대 교수 중에 일본어가 유창한 분이었기 때문에 일본 디자인을 폭 넓게 받아 들여 한국 그래픽디자인계에서 대부 역할을 하게 되었다. 디자인 분야도 물론 항상 언어가 중심이다. 더구나 디자인 분야는 정보예술이라고 하지 않나. 정보를 취급하기 때문에 언어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항상 주도권을 쥐게 된다. 당시에 문자 환경은 말하자면 아주 초보적이었고,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인재들의 능력과 감각들도 일천해 도토리 키재기였는데 거기에 새로운 움직임이 하나 나타난 것이 한국브리태니커회사의 한창기 대표가 <뿌리깊은 나무>(1976)라는 잡지를 창간했던 일이다. 아트디렉터란 개념도 없던 시절에 이상철이라는 분이 아트디렉터로 일하면서 활자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그때는 ‘식자’라는 것이 있었다. 일본을 중심으로 발전해 온 분야이고, 일본 식자 문화의 총본산이랄 수 있는 일본샤켄의 한국지사가 바로 ‘한국사연’이란 곳이었다. 한국사연 사장이 한글에 대해 애정과 야심,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었던, 서울대 정치외교학과를 나온 김영옥 씨였다.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뿌리깊은나무>가 창간되기 몇 년 전, 내가 대학 졸업작품으로 서체 디자인을 시도한 일이다. 여기에도 배경이 있다. 당시 일본에 쿠야마라 야사부로라는 그래픽디자이너가 있었다. 이 분이 1970년대 초에 우리나라의 산업디자인전에 해당하는 일본의 ‘일선미전(日宣美展) ’ 이라는 전람회에서 상을 받으면서 <서체디자인>이라는 책을 냈다. 서체 디자인에 대한 사상을 정리한 것이 아니라, 서체 디자인에 등장하는 각종 도구나 프로세스 등 실무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책이었다. 내가 졸업작품으로 서체를 디자인한 것은 그 책을 읽어보고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것이 당시 대학가에서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일으켰다. 서체디자인이란 것을 생각치도 못하던 시절에 대학생이 그런 걸 했으니까. 당시 한국사연의 김영옥 사장이 도움을 준 것이다. 쿠와야마 야사부로의 책을 보고 한국사연을 찾아 갔었다. 학과는 달라도 대학 선배였으니까. 한국사연이 일체의 경비를 지원해서 그 작업을 해 낼 수 있었다.



...............1978년 <황미디엄>이란 책을 냈다. 어떻게 출간하게 된 것인지?

...............졸업하고 군대에 갔고, 군대에서 ‘육군대학공원화’ 란 프로젝트에 투입되게 되어 전문가로서 대접을 받았다. 휴가 시기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었다. 당시 산업디자인전에 세번 추천을 받으면 추천작가가 될 수 있었다. 대학 때 한번 추천 받았고 군대에서 두 번 추천 받아서 추천작가가 돼 버렸다. 당시 추천작가가 되면 석사학위에 준하는 자격을 줬다. 그래서 만 26세에 대학교수가 됐다. 디자인계가 한마디로 땅 짚고 헤엄치기였다. 워낙 수요는 많은데 공급이 못 따라갔다. 지금은 디자인과를 졸업해도 취직하기 힘들고, 디자인의 값이 떨어져서 고생만 하는 그런 분야가 되어 버렸는데 그 당시는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금값이었다. 특히 서울대나 홍익대 출신들은. 산업이 막 발전하던 시절이었으니까. 고도성장기라 디자이너는 필요한 데 사람이 없어서 당시 공부했던 사람들은 거의 다 교수가 되거나 기업체 간부가 됐다. 명지전문대학에서 맡은 과목이 레터링과 편집디자인이었다. 강의하면서 <황미디엄>이란 책을 냈다. 그 책의 출판 의의는 한글 디자인을 할 때 도대체 한글을 몇 자를 써야 하느냐는 이런 개념조차 없을 때, 디자이너 주도로 서체 디자인을 최초로 시도해 접근가능한 최소한도의 프로세스와 정보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학생 중에 손재주 좋은 두어 명과 함께 1350자를 써서 교재 겸 출판한 것이었고 초판 500부를 찍었다. 그 뒤로 컴퓨터 시대가 바로 와 버렸기 때문에 책의 의의는 이내 사라졌다. 그런데도 책을 찾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지난 35년 동안 야금야금 다 없어져서 지금은 한 권도 남아 있지 않다. 대단한 책은 아니었고, 지금 보면 드로잉도 거칠지만 많은 디자이너에게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디자이너들이 서체 분야에 뛰어 들어야 한다는 자각을 심어 준 게기를 마련해 준 책이었다.

...............‘황미디엄’ 서체 형태의 특성은 무엇인가?

...............탈장식주의, 옵셋 인쇄 시대에 맞는 글씨고(가령 활판 시대에는 인쇄를 하면 글자 끝이 문드러지는 경향이 있어 가독성을 위해 세리프를 줬다) 클래식한 문자환경이 만연한 문자환경에서 모더니즘을 추구한 서체라고 볼 수 있겠다. 컴퓨터 시대가 오기 전에 한동안 활발하게 사용되기도 했다. 다 기억할 순 없지만 대표적으로 처음 1985년 부산지하철이 생길 때 거기서도 채용해서 썼다. 아무래도 작업하기가 좋았을 것이다. 디자이너들이 <황미디엄>에 수록된 글자체를 나름대로 변형해 사용했다. 두껍게 변형하기도 하고. 수평형이나 수직형으로 변형해서 스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평범한 글자체였지만,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황미디엄> 이후 어느 분야에서 활동했는지?

...............명지전문대에서는 주로 단 두 과목을 가르쳤다. 레터링과 편집디자인이다. 그 과목들은 우리나라 대학 중에서는 최초로 개설된 것으로 알고 있다. 편집디자인 과목에서는 미국의 <타임>, <세븐틴>, <우먼즈데이> 등의 잡지를 교재로 사용했다. 이렇게 전문적인 이론과 실용정보를 모두 다뤘다. 그곳에 7년 동안 재직했는데, 제자들이 잡지사에 많이 들어갔다. 그게 초기고 홍익대에서 편집디자인 붐이 일어난 것은 안상수 씨가 교수로 간 이후다. 1983년을 전후해 나는 서울올림픽대회조직위원회 디자인 실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안상수 씨는 편집 디자인으로 개업했고, 김현 씨는 CI로 개업을 했다. 김진평은 대학 동기동창이다. 김진평이 처음부터 레터링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몸이 안 좋아서 군대를 가지 않았기 때문에) 나보다도 먼저 신구전문대학 교수를 했는데 실무경험 없이 너무 일찍 교수가 되다 보니 한계를 느끼는 듯 했다. 이래선 안되겠다라고 생각하고 <리더스 다이제스트> 창간될 때 아트디렉터로 들어가서 활자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렇게 실무 경험을 쌓아서 서울여대로 가서 한 축이 되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김진평의 작업 또한 <황미디엄>과 마찬가지로 아날로그 시대의 레터링이라고 할 수 있다. 김진평의 대표작으로는 한글디자인에 관한 제대로 된 책을 한 권 낸 것이다.

...............1970년대의 활자와 관련한 실무 환경은 어땠나?

...............문자를 디자인하는 환경이 요즈음과 같지 않아서 일일이 한자한자 손으로 써야 됐다. 디자이너들이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 한가지는 세계적으로 활자 문화는 신문사들이 리드한다는 거다. 우리나라도 신문사에서 활자 작업을 하는 분들이 많이 있었다. 그중 알려진 분은 한국사연과 인연을 맺은 최정호 씨다. 우리나라는 처음에 디자인계가 학교를 중심으로 세력이 형성됐다. 그래서 학교 주변의 인물이 아닌 사람은 대접이나 평가를 받지 못했다. 많은 장인이 평생 활자로 먹고 살았다. 신문사마다 한 명씩 있었다. 납활자 시대에는 새로운 글자들이 계속 나올 때마다 바로바로 활자 주조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신문 기사들 속에 한문이나 특수문자, 그리고 한글 같은 경우도 1350자 외의 글자들이 발생하는 일이 많았다. 외국 기사 번역할 때 ‘슁’ 같은 글자가 나오면 바로 활자를 주조했다. 초기에는 디자이너들이 폰트를 개척한 것은 아니다. 나중에 디자인 제도권으로 끌어 들인 것이라고 보면 된다.

...............당시 한글 레터링의 특성을 전체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20세기 후반 한국에 출현한 레터링들을 유심히 관찰해보면 공통점이 지나치게 기교를 부렸다는 것이다. 아르누보나 아르데코를 겪지 않은 디자인계의 한계라고 생각한다. 아르누보라는 역사적 과정을 거친 사회에선 아르누보 이후 수학적 합리주의, 탈장식, 스위스 스타일을 추구했다. 우리나라는 그런 과정이 없었기 때문에 최근까지 그런 경향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기교 부리고, 물결 치고, 장식 넣고 하는 것인데, 한마디로 다 유아적이고 유희적이다. 우리나라 레터링의 40~50년을 반성해 보면 한마디로 유아적이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 디자인의 근본에 충실하지 않은 것이고, 사회의 수준과도 관계가 있다. 80년대까지는 디자이너들이 문제에 대한 근본적 해결방법을 수학적 합리주의에서 찾거나 수학적 합리주의로 풀어나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클라이언트들도 마찬가지였고. 꾸미면 예뻐지는 거 아니냐 는 식이었다. 그 속에서 군계일학들도 종종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문자 환경이 그랬다. 가령 레터링을 할 때 장식 없는 글자로는 돈 받기가 곤란했다. 사실 장식 없는 글자가 더 어려운 것인데, 단순히 활자체를 조립한 것에 불과하다고 보는 인식이 팽배했다. 단순미가 강조된 문자 조형으로는 설득이 잘 안되던 시절이었다. 레터링뿐만 아니라 로고나 CI도 비슷했다. 회고해 보면, CI 분야에서 많이 정리가 된 건 해외 유학파들이 한국에 들어오면서부터가 아닌가 한다. 어느 분야든 그 분야의 중심이 되는 전문가의 사고가 바뀌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사회는 자연스럽게 바뀐다. 템포는 느릴지언정 반드시 바뀐다. CI 분야에서 그런 역할을 한 사람이 지금은 고인이 된 정준 씨다. 그 분이 한국에 CI 디자인의 플래닝 개념을 가지고 오기 전엔 우리나라에는 ‘제안서’(Proposal)라는 것이 없었다. 주먹구구식으로 기획서가 쓰여졌고, 참여하는 사람들의 이력서와 일정표, 견적서가 전부였다. 그것을 서구 스타일로 바꿔준 게 정준 씨고 전문가들에게 큰 영향을 줬다. 그때부터 제안서가 두꺼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70~80년대 CI는 대학 교수들이 주도했다. 그 시절 CI의 특성이라면?

...............한마디로 ‘독학한’ CI였기 때문에 접근 방법에 무리가 많았다. 충분한 리서치도 없는데다가, 창조적인 사고가 제대로 형성이 안된 상태였기 때문에 십중팔구는 표절과 모방 사이에 있었다고 봐야 한다. 큰 흐름으로 보면 거의 다 그랬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이 CI에 접근하는 방법론을 몰랐으니까. 한글 같은 경우는 영어나 일본어의 감각을 한국어로 ‘번안’하는 식이었고. 그 당시에는 겁이 나서 서로 쉬쉬 하면서 말을 못했다 뿐이고, 그때 한국의 실력이 그것 밖에 안됐다는 얘기다. 당시 그 유명한 제일모직, 제일은행, 대우그룹 마크가 표절 혹은 모방의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선생이 직접 쓴 대표적인 레터링을 소개해 달라.

...............내가 쓴 글자 중에 기억나는 것은 ‘골덴텍스’(1975)와 ‘흥국생명’(1983)이다. 이 글자들이 그나마 오랜 사랑을 받은 건 장식적인 것과 거리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골덴텍스’의 경우 ‘골’, ‘덴’, ‘텍’은 문자 구조가 복잡한 것이 비슷하다. 반면 ‘스’자는 굉장히 단순하다. 그래서 ‘스’을 잘 해석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했다. 사실 ‘골’, ‘덴’, ‘텍’ 같은 경우엔 기본 구조가 워낙 복잡하기 때문에 그 것을 장 정리해서 쓰는 것 만으로도 디자인이 된거라 할 수 있다. 한편, 당시의 비즈니스 환경도 고려해야 했는데, ‘골덴텍스’가 간판으로 걸릴 일은 별로 없었고 레이블 형태로 사용되거나 신문이나 잡지 광고에 로고로 사용되는 빈도가 절대적이라고 봤다. 당연히 글자의 주된 사용처를 글자 형태를 결정하는 중요 요소로 보았고, 또 신사들이 볼때 안정감이 있고 품위있게 느껴지는, 경쾌함 보다는 중후함이 느껴지는 형태를 잡아가고자 했다. 사실 문자의 운명이라는 게 ‘골’, ‘덴’, ‘텍’, ‘스’라는 네 글자가 만나 이미 결정된 거다. 그 운명의 조건을 거역할 수는 없다. 레터링, 타이포그래피에서 그 운명의 조건을 가장 잘 조화시키는 게 굿디자인이다. 그 주어진 조건이란 것이 바로 문자환경인데 보통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글자만 쳐다보지만 전문가들은 그 배경을 먼저 본다. 배경이 어떤 식으로 공간에 짜임새를 부여하는가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고(글자 사이의 여백의 균형을 잡는 것), 다른 하나는 어떤 방향으로 감각을 잡아야 하는가다. 글자의 굵기 같은 구체적인 디테일, 가령 볼드해야 하는가 라이트해야 하는가 미디엄해야 하는가, 그다음 라운딩을 많이 줄 것인가 덜 줄 것인가 등을 기업이나 제품 성격에 맞추는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이 사실은 한계가 있다. 보통 디자인은 10년 유지하면 성공이라 하는데 더 지속될 수 없는 이유는 사람들이 자꾸만 새로운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커피숍을 생각하면 50-60년대와 지금 커피숍에 근본적 차이는 없다. 커피를 끓여서 테이블에 올려서 마시는 것은 똑같지만, 패션이 확확 달라지잖나. 디자인에는 그런 식으로의 감각적 변화가 항상 있어왔다. 넥타이가 좋은 비유가 되는데 남자들 넥타이가 똑같은 것 같지만 5-10년 주기로 넓어졌다 좁아졌다 한다. 그런데 10년 전의 좁은 넥타이를 지금 매면 촌스럽다. 지금 좁아진 건 옛날에 좁아진 거랑 또 다르다. 사각형과 동그라미 사이에 얼마나 많은 감각이 존재할까? 무한대로 존재한다. 감각이란 끝이 없는 것이니까. 감각의 장사가 소위 디자인인데, 정답이 없다. 문자도 그런 것에 지배를 받는다. 아무리 잘 디자인된 문자라 하더라도 한계가 있고 로고 같은 경우도 사실 정답은 없다. 로고가 좋다고 상품이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게 다 잘 맞아 떨어져야 되는거니까. 어떤 로고는 디자인 자체는 별론데 워낙 그 상품이 성공했기 때문에 우수하게 봐주는 경우도 있고, 또 아주 우수한 로고를 채택했는데도 비지니스가 성공하지 못하면 그 로고는 평가가 굉장히 절하된다.

...............‘흥국생명’ 글자의 특성이라면?

............... ‘흥국생명’의 디테일을 보면 지금은 아주 흔하지만 ‘ㅎ’자를 비롯해서 아랫쪽 모음과 자음을 그렇게 한 덩어리로 쓴 건 처음이었다(‘ㅇ’을 위로 붙임). ‘생’자와 ‘명’자는 리듬이 비슷하지만 ‘흥’자는 가로획이 너무 많은 반면 ‘국’자는 가로획이 부족해서 ‘ㅎ’과 아랫쪽 모음과 자음의 조형 요소들을 서로 붙였다. 그렇게 균형을 잡아 준거다. 받침에 사용되는 세개의 이응도 모두 똑 같다. 당시에는 이런 형태가 없었다. ‘ㅎ를 이렇게 써도 돼?’라는 식의 반응이랄까? 그외 괜찮은 부분이라면 전체적인 가로, 세로 균형이고 4개의 동그라미(‘흥’에 2개, ‘생’과 ‘명’에 각각 하나)에 통일성을 부여하면서 약간의 변화를 준 것이다. 전문용어로는 ‘유니티 위드 버라이어티’수법이 적용된 디자인이다.

...............그외 소개해 줄 만한 레터링이 있다면?

...............1995년에 중앙일보 제호를 썼다. 신문사 로고로는 너무 가늘고 경쾌하지 않냐는 의견이 있어서 설득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그 뒤로 많은 신문사 로고들이 중앙일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이것은 비지니스와 연관이 되어 있는 문제다. 그 로고를 도입하기 이전에는 판매부수가 조ㆍ동ㆍ중이다가 로고를 도입하고 1~2년 뒤에 조ㆍ중ㆍ동으로 굳어졌다. 디자인은 비지니스가 잘 돼야 빛을 보는 측면이 분명히 있다.

...............최근 한글 레터링에 대한 관심이 젊은 디자이너 사이에 상당히 높다.

...............좋은 활자들이 넘쳐나고 세련된 것들이 많아진 시대이다 보니 일제시대 간판 스타일 같이 조금은 투박하지만 인간미 넘치는 쪽으로 어필하는 거다. 수학적 합리주의가 넘쳐나면 해체주의와 복고주의, 키치가 등장하는 시대의 흐름이다. 한편, 그래픽디자인은 원래부터 그러한 모든 경향의 알파부터 오메가까지를 다 수용한다. 아르누보, 아르데코부터 모더니즘, 수학적 합리주의, 해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이런 모든 것들이 항상 공존하는 것이 그래픽디자인의 특성이다. 쉽게 말해 종이 위에 그리는 거니까 무한대로 그릴 수 있다. 그림으로 치면 피카소나 몬드리안의 그림도 좋고, 동양화나 서예도 그것대로 좋다는 식이다. 활자나 로고도 마찬가지다. 다만, 정답은 없다. 그 시점에서 어떤 비즈니스에 대한 정답은 있을 수 있겠지만 감각에 대한 정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선생이 졸업전시에 발표한 40년전 서체를 보면 무슨 생각이 드나?

...............글씨체 자체는 ‘황미디엄’과 유사성이 있고 특히 ‘ㄴ’이 비슷하다. 가로 획이 굵고 세로 획이 가는데, 원숙한 경지에서 되돌아보면 미숙한 작품이다. 말하자면 아르누보나 아르데코의 기질이 여전히 남아있다. 멋을 엉뚱하게 해석하던 시절이다. 이 디자인의 맹점이 ‘ㄱ’같은 경우는 휘어져서 내려오는데 지나치게 멋을 부린 거다. 지금보면 많이 거슬린다. ‘ㅅ’, ‘ㅈ’같은 경우도 기능보다는 멋을 강조했다. 이럴 필요가 없다.

...............마지막으로 후배 그래픽디자이너에게 조언해 달라.

...............일본 최초의 스타 그래픽디자이너라고 할 수 있는 가메쿠라 유사쿠(龜倉雄策)라는 분이 있었다. 그는 그래픽디자이너 능력의 90%가 문자를 다루는 기술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문자를 다루는 기술을 보면 그 디자이너의 역량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문자에 예민해야 한다. 나는 현재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를 보낼 때도 가급적 띄어쓰기와 맞춤법을 완벽히 한다. 문자를 소중하게 다루는 정신이고 이런 게 문자 디자인에 그대로 녹아든다고 생각한다. 로고 디자인이나 타입 페이스 디자인을 의뢰받아 할 때도 자세가 다를 수 밖에 없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나는 국내 디자이너들이 개발한 서체를 채용해서 쓸 때, 바디 타입 말고 헤드라인의 경우, 영어와 숫자는 115% 정도 확대해서 쓴다. 이상하게 우리나라 서체 디자이너들은 영어나 숫자를 작게 매치시키는 듯 하다. 본문에 들어갈 때는 작아지니까 상관 없는데 포스터 등에 크게 쓸 때는 굉장히 어색하다. 높이나 중량감이 같아야 하는 것 아닌가? 내 경우 문자 그 자체보다는 문자가 만들어 내는 사이사이의 공간을 더 중요시하는 편이어서 컴퓨터에 뜨는 대로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스페이스를 일일히 조정해서 쓴다. 디자이너에게 주고 싶은 충고는, 역시 문자가 90%라는 것이다. 레이아웃ㆍ컬러ㆍ사진 이런 것은 다 합쳐봐야 10% 밖에 안된다. 그만큼 문자를 다루는 기술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신은 디테일 속에 있다’(God is in the Details)라는 말이 있다. 문자는 엄격히 말해 감각을 낼 만한 부분이 없기 때문에 디테일의 차이일 수 밖에 없다. 문자의 획들이 만드는 수많은 공간, 글자와 글자 사이의 균형ㆍ탈장식ㆍ방향성 따위를 깊이 숙고하는 디자이너가 되길 바란다.

...............선생의 향후 계획을 말해 달라.

...............앤디 워홀은 원래 그래픽디자이너였고 인생 만년에 예술가로 전향한 사람이다. 우리나라에서 앤디 워홀처럼 회화로 전향해서 성공한 첫 케이스가 되고 싶다. 내 젊었을 적 별명이 도쿠가와 이에야스다. 뚱뚱하니까 친구들이 그렇게 불렀다. 일본인이 가장 닮고 싶은 인생관을 지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언 중에 “인생이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 서두르지 말라”란 말이 있다. 지난 63년의 인생을 돌이켜 보면 일찍 스타덤에 올라서 영광된 순간도 많았고, 반면에 수치스럽고 굴욕적인 경험들도 있었다. 다행스런 것은 회화로 전향한 이후, 그 결실이 마음에 든다는 것이다. 요즘 평균 수명이 자꾸 길어진다. 내 경우도 특별한 일이 없으면 20~30년은 더 살 수 있다는 얘기다. 이 나이에 디자인을 한다면 기업체를 상대로 디자인을 팔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디자인 비즈니스 조직을 운영하는 것도 그렇고 경쟁에서 질 수 밖에 없는 구조다. 반면, 예술은 혼자하는 일이고, 순간순간 평가 받는 일도 아니다. 디자인을 하면서 한가지 아쉬웠던 것은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고 하던데, ‘예술은 길고 디자인은 짧다’는 것이다. 디자인의 수명이 굉장히 짧다. 120년 전에 만들어진 제너럴 일렉트릭 마크 같은 예외적인 사례를 빼고는 아무리 잘 된 명작 로고라도 20~30년을 버티기가 힘들다. 누구나 창작자라면 자기 작품을 영원히 남기고 싶은 욕구가 있다. 나는 많은 작품을 남기고 싶다. 적어도 몇 백점, 꿈같아서는 2~3천점 정도 남기고 죽고 싶은데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웃음)

...............- 2014년 '프로파간다' 출판사와의 인터뷰 중에서



...............한글 활자 원도집 낸 황부용 씨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한글을 만들기 위해 활자체 개발에 고심하는 젊은 그래픽디자이너가 나타나 주목되고 있다. 최근 '황 미디엄'이라는 그의 한글 디자인 시리즈 첫 권을 낸 황부용 씨. '미디엄'이란 활자의 중 명조체를 가리키며 일종의 고딕체의 변형 원도집이다. "우리나라 인쇄용 활자체는 개발이 안 돼 아주 단조합니다. 특히 제목 활자는 외국처럼 다양하고 장식적인 개발이 시급하지요. 동료들 사이에 근래 관심이 높아진 편이지만 막상 달려들지 못하는군요." 노력에 비해 전혀 상업성이 없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활자를 고안한다는 것은 마땅히 디자인 분야의 소임이지만 사회적 기여치고는 너무도 보이지 않는 밑거름 작업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문자 체를 고안해 내도 사회적으로 실용화가 안되면 개발한 의의가 없다. 막상 보급되어도 유행되기까지는 10년이 걸리는 게 상례다. "활자는 우선 보기 좋고 읽기 쉽고 현대 생활의 감각에 일치해야 됩니다. 이번에 써 본 한글체는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획의 일부를 굴려서 멋을 내었고 또 획의 자음과 모음 사이 붙여쓰기와 'ㄸ' 'ㅃ' 등에 생략법을 적용시켰습니다." 서울대 미대 응미과 학생 때부터 활자에 관심을 가져왔고 이번 작업에 3년이 걸렸다고 황씨는 말한다.

............... 빈도수가 많은 1300자의 원도를 일일이 그려서 한권의 책으로 출판한 것이다. 그의 글씨체는 종래의 보수적인 활자체보다 신선한 연파책자의 타이틀 글씨. 여러 가지 장식적인 활자체를 만들어서 시리즈를 낼 계획이다. "탁상에서 생각하는 것과 인쇄상의 효과는 다소 차이가 생길 것입니다. 또 사람의 착시 현상에 대한 보완책 등 연구 과제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 분야의 개발이 너무 안돼 있고 누군가가 해야 하는 일이므로 계속해 볼 작정입니다." 부산 태생으로 이제 27세. '월간디자인'을 간행하면서 명지실업전문대학에 전임강사로 나가고 있다.

...............- 1978년 10월 9일자 중앙일보



Interview | Articles-1 | Articles-2 | Articles-3 | Illustrations-1 | Illustrations-2 | Logos-1 | Logos-2 | Pictograms | Posters-1
Posters-2 | Publication | Newspapers-1 | Newspapers-2 | Typefaces | Packagings | Environments | Profile

Copyright (C) 2001-2014. This website is copyrighted by Buyong Hwang. All rights reserved.

Since March 1, 2001